학부 6년 회고
졸업식 회고를 써야하는데.. 졸업한지 9달이 흘렀고 졸업을 할 거란 걸 안 지는 훨씬 지났으니 써야하는데 참 계속 미루고만 있네요.
분량이 너무 방대하고 찾아봐야할 자료가 너무 많고 하다보니까 주저주저하게 되어서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냥, 사실과 조금 다를 수도 있는 수준에서 글을 완성하는 데 목적을 두려고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어도 글의 70% 정도는, 전체 방향성 정도는 사실이지않겠습니까? 막말로 내 인생 내가 이렇게 살았다는데 누가 반박할거야.
들어가봅시다. 고등학교 3학년부터.
고3
저는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교육부 산하 재외동포(?)를 위한 학교였기 때문에 교사 100% 학생 100% 한국인이셨어요. 제 기억으로는 저는 고3 때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선행을 하도 많이 해서 고1-2때 대부분 과목을 끝내고 대부분 스펙이 준비되기도 했고 (만점은 아니지만 집안에서 미국 대학을 진학하는 건 반대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점수가 의미가 없었어요.) 제 생각엔 이때부터 우울했던 것 같아요.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더 어릴 때는 막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고 허벅지 샤프로 찌르고 막 ㅋㅋ 그런 귀여운 일도 하면서 공부했는데 고3때는 딱 유지에 필요한 공부만 했습니다. 이미 외운 단어장 복습. 뭐 당연히 모르는 거 배우긴 했는데 잊는 속도랑 새로 배우는 속도랑 맞아떨어져서 동적 평형이 생기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가장 부족한 과목이 수학이었는데, 제 마음속의 라이벌이 한 명 있었거든요. 수학을 너무 잘해. 뛰어넘을 수가 없어. 뭘 해도. 그래서 약간 수학을 놓은 것도 있지 않았나 싶어요. 고등학교 과정 안에선 그 친구가 조금만 잘했고 그 친구가 실수하면 아주 가끔 제가 좀 더 잘하고 이런 게 있었는데 (천장이 있다 이거죠), 고대의 본고사 킬러라거나 뭔가 기상천외한 창의력을 요구하는 문제가 나오면, 저는 0점 그 친구는 100점 이랬어요. 그래서 수학을 놓았는데, 그땐 몰랐지.. 그 친구가 수학과 박사를 갈지 (…) 이래서 남이랑 비교하면 안돼요…
아직도 잘 연락하고 지내고 있고 그 친구는 모르겠지만 참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아직까지도.
그런데 고3 부터 지금 이렇게 고등학교 친구들 이야기 한 명 한 명 선생님들 이야기 한 명 한 명 하다보면 끝이 없겠어요. 고등학교 친구들께는 죄송하지만 이만 끊겠습니다. 앞으로 저는 7년치를 더 적어야해요.
대1 (13년)
공부
고생 끝! 행복 시작! 인 줄 알았지.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서 로드킬만 간신히 피한 그런 해였다고 하겠습니다.
공부를. 다들. 너무 잘해.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어요. 진짜로. 고등학생때는 다들 뭐 문제를 뭐 이렇게 빨리 풀어 너는 이게 어떻게 돼 너는 정말 대단하다 .. 선생님이 보기에 너는 진짜 인재다 인재 큰 일 할거다 뭐 이런 칭찬이 저는, 고맙지도 않은, 아이고 뭐, 감사합니다, 근대 뭐 맨날 그런 소리 들어요. 강동원한테 잘생겼다고 하면 그런 느낌이었을까요? 부럽다.
그리고 플러스로 저는 고3때 공부를 거의 안했어요. 우울과 무기력은 그때부터 시작됐어서. 그래서 공부하는 법을 까먹었어. 그게 되냐? 싶지만, 여러분 대학때 고등학생때처럼 공부했어? 아님 대학졸업하고 1년 뒤에 다시 대학때처럼 공부하라그러면 할 수 있어요? 특히 학번 전체랑 경쟁하는 기초과목같은… (아니라고해주세요)
그리고 또 플러스로 저는 제 방을 초등학교 4학년에 처음 가졌어요. 9살이죠. 그리고 13년도에 제가 18살이었으니까, 9년만에 처음으로 남이랑 방을 써봅니다. 몇 년 뒤 심리상담에서 알게 된 건데 저한테 “방”, 저만의 독립된 공간은 아주 큰 의미를 차지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것도 마이너스 요소였습니다.
그리고 신문사도 들어갔죠, 장기적으로는 좋은 일이었지만 1학년 제 학점에는 안좋은 일이었습니다.
결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C를 받아봅니다. 1학기 C3개 B3개 A2개 (A는.. 1학점짜리과목 ㅎㅎ).. 이게 장짤(장학금 수령을 할 수 있는 최저학점 미만)이에요. 그래서 다음 학기부터 원래는 장학금이 짤리고 등록금을 다 제가 내야 했는데, 다행히 1학년 1학기는 한 번 봐줍니다. 그래서 2학기때 진짜 서럽게 공부했어요. 다행히 2학기는 C(물리)하나 B(원자력 뭐시기)하나 나머진 A였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건 카이스트 1학년은 공부하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는 거예요. 다들 게임하고 술먹고 수업빼먹기 바빴어요. 유유상종이라 그런지 몰라도 제 주변은 다 그랬어요. 저도 친구들이랑 같이 놀았는데 친구들은 다 A인데 나만 B, C야.
근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자기들은 다 고등학교때 배운거래.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저한텐. 남들은 복습하는 거라고 즐기고 놀고 있는데 나는 최선을 다해도 그걸 못따라가겠어요. 근데 놀고도 싶거든. 무리에 끼고 사회에 동화되고 하고 싶거든. 근데 결국 뭐. 친구들이랑 잘 놀았고 학점은 ㅋㅎㅎ..
학과선택
그리고 카이스트 1학년 말이 되면 인생에 다시 없을 아주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학과 선택이에요. 개인적으로 고3때 이걸 안하고 대1때 이걸 해서 제 인생이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고3때 카이스트 빼고는 다 물리학과를 썼거든요. (부모님이 좀 저를 싫어하셨나봐요 그죠 … 사실 제가 고집이 엄청 쎘던 거겠죠? 부모님은 사실 의대가라고 했어요 ㅋ) 근데 저 학부 1학년 물리1 ,물리2 둘 다 C입니다.
저는 깨달았어요. 물리는.. 내가 할 게 아니구나.. 내가 잘 했고 좋아한 건 고등학교 물리지 .. 물리가 아니구나 .. 그래서 튈 궁리를 합니다.
어딜 갈 지는 모르니까, 일단 안 갈 곳을 정하기로 했어요. 기준을 하나씩 추가해가다보면 마지막에 남는 곳에 가면 되지.
그래서 첫 번째 기준으로, “수학을 하지 않는 곳”을 넣었어요. 그랬더니 앵? 선택지가 세개가 남습니다.
전산, 산디, 자퇴.
(이 결정은 나중에 큰 문제가 됩니다 왜냐면 제가 전산 기초에서 수학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전산 전공에서 수학을 쓰지 않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퇴는 에이, 그걸 어떻게 한 번 더 해. 시러. 전산 산디를 두고 고민했습니다.
주변 선배들을 한 번 둘러봤어요. 전산과 사람들은 다 놀자판이더라고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전산과 안에서도 특히 많이 노는 그룹이었습니다 ..) 산디사람들은 막 맨날 병원가고 힘들어 죽고 그래 (역시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은 그 분의 지병이었습니다..)
신문사 선배 중 전산 주전이고 산디 과목도 좀 들어봤던 사람이 그냥 전산 하라고 했어요. 전산 하면 자기가 요약한 노트나 자료 다 준다고… 어? 해서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안 게 왤케 많은진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고등학교 때 수학을 엄청나게 잘했고 지금도 수학으로 밥을 먹고 살며 .. 하여튼 이사람이 들은 과목(수리전산) 중에 제가 들은 게 몇 개 없어서 도움을 별로 못받았습니다 ㅡㅡ)
그리고 그때는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었어서 뭔가 외국에서도 쉽게 구직할 수 있고 이직도 쉬운 학과를 찾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복합적인 요소가 적용됐어요.
그래서 전산으로 했습니다! 전산 짱! 근데 진짜 자퇴안하고 전산한거 넘 잘 한 것 같아요 인생에 복권터진적은 없지만 이렇게 생각없이 결정한 게 어떻게 좀 중박이 터져서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대2 (14년)
슬슬 쓰는데 힘이 달리네요…
뭐지? 왤케 뭐가 기억이 안나지? 싶었는데, 이 해는, 제가 수술을 한 해였군요.
14년도 전반기(1,2분기, 1학기) 기억은 별로 안납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아는 분은 제보 바랍니다.
편집장제안
5월에 내년 편집장이 되어달라고 말을 들은 기억이 나네요.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큰통치킨 옆의 지하에 바에서 손님이 거의 없고 (아마 저희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제안을 들었습니다. 당시 제 자아는 아주 위축돼있어서, 저보다 더 나은 동기들이 모두 거절해서 제게 제안이 온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때는 아주 의외였던 것 같아요. 내가? 그리고 좀 괜히 불쾌한 마음도.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거절했으니 나까지로 온거구나 싶은.. 근데 몇 년 뒤에 들어보니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애초에 수습 면접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어디까지 사실인지, 어디까지 제 기억 조작인지는 모릅니다만 .. 제 지금 해석은 이래요. 제 동기들은 다들 평소에 편집장을 안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고, 저는 애초에 시켜줄 거라는 생각도 안해서 그런 말을 안해서 저한테 오퍼가 온 게 아닌가 하는 ㅋㅎㅎ..
아무튼 그랬습니다. 제안을 들었고, 고민하다, 수락했어요. 고민한 건, 뭐, 쉽지 않은 길이니까요. 그래서 그랬고, 수락한 건, 내 평생 적자 걱정 안해도 되고 직원 26명이나 있으며 퇴직하면 책임도 안져도 되는 단체를 경영해볼 기회가 있을까? 아무런 cost없이? 이런 생각에서 오케이 했고, 정확히 그런 맥락으로 아주 귀중하고 값진 경험을 했습니다.
다시 하라면? 고민해보겠지만 다시 할 것 같아요. 이번엔 건강관리를 좀 해야겠죠.
기흉
아픈 기억이네요. 아무튼, 14년도에는 폐가 터지기도 했군요. 14년도 여름. 삼성 무슨 소프트웨어 캠프에서 터졌어요. 마지막 발표 전날 밤이었어요. 다들 부산하게 준비하고 저희도 밤새 준비했었죠. 수원 연수원인가? 그런 연수원이었고, 비가 많이 오는 날 밤이었어요. 연수원엔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저희 숙소는 4층인가 3층이었어요.
그 캠프 내내 전 숨이 가빴어요. 발표도 양해를 구하고 강단에 의자를 가지고 가서 앉아서 발표하고 그랬죠. 뭔가 이상했어요. 숨이 잘 안쉬어지고, 숨이 가쁘고, 격렬한 행동을 하면 심장이 아프고. 근데 전 평소에도 가끔 그럴 때가 있어서 그러려니 했어요.
그날 밤은 좀 달랐어요. 시간이 지나면 보통 가라앉았는데, 점점 고통이 강해졌어요. 겨드랑이가 아팠어요. 숨도 안쉬어지고, 겨드랑이는 점점 아프고, 생각도 잘 안됐어요. 조별과제를 해야하니까 말을 해야하는데, 머리가 잘 안굴러갔어요.
그래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진통제를 받아와야겠다고 일어나야겠어요. 그때까지만해도 통증이 있어보이긴 했어도 거동이 불편해보이진 않았어서, 그냥 잘 다녀오라고 저를 보냈어요. 진통제는… 실외에 있었어요. 1층 경비실. 그 차량 출입차단기 오르내리는 곳.. 1층 정문 옆 경비실에 상비약이 있었어요. 그래서 4층부터 1층까지 계단으로 내려가서, 우산이 없으니 비를 맞고 경비실에 가서 진통제를 받아서 먹으면 되는 계획인거죠.
저는.. 체력이 한 60%정도 남은 상태로 출발했어요. 아무도 부축해주겠다고 나서지 않았으니까 꽤 괜찮은 기억인 것 같아요. 근데 한 층을 내려갈 때마다 체력이 15%씩 깎이더라고요. 15 * 4 = 60입니다. 저 1층 도착해서 쓰러졌어요. 도저히 걸을 수가 없고 의식이 흐려져서.
그 연수원이 검은색 돌판으로 로비가 쫙 깔려있는데, 거기 쓰러지고, 눈이 천천히 감겼던 것 같아요. 소리도 못질러요. 폐가 터져서 숨을 못쉬고 있는데 어떻게 소리를 질러. 그리고 몇 초 있으니까 로비가 어둠에 잠겨요. 왜, 센서등 쓰는 화장실에서 움직임 오래 없으면 화장실이 깜깜해지잖아요. 그거랑 같은 거예요. 로비가 어둠에 잠겼어요. 밖에선 비가 내리고. 돌바닥은 차갑고, 저는 소리를 낼 수도 없고 몸이 움직이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얼마나 있었는지는 사실 모르겠어요. 오래 있었으면 찾으러 내려왔겠죠? 아마 그래서 한 5분정도일 것 같아요. 마침 그때 1층에 볼일이 있어서 내려왔던, 이것도 참 우연의 일치인데, 제 당시 캠프에서 룸메이트가 저를 발견한 거예요. 제가 평소에 몸이 좀 이상하다고 말하는 걸 가장 자주 들었던 사람이라 바로 택시타고 응급실 가서, 이것은 폐에 구멍이 난, 기흉입니다! 라는 진단을 받고 잘 치료했어요. 감사합니다 (__)
2학기
이때도 기억이 선명한 건 별로 없는데 .. 기흉이 많이 터졌어요. 저는 수술을 해야했고, 휴학을 하고, 수술을 했어요. 사실 학기를 완주하고 싶었는데 여름방학부터 수술결정까지 7번이 터져서 (1달에 1번 이상) 도저히 완주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보통 한쪽에서 2번인가 3번 터지면 보충역판정이거든요. 저는 7번이니까. 뭐, 그러고 보충역 판정 받았고, 휴학을 했어요.
휴학하고 회복을 위해 집인 거제도로 내려가있었는데 그동안 편집장 선거가 있었고, 단독 후보인 저에 대한 투표가 있었어요. 반대표가 두 표 나왔는데, 죽을 때까지 누가 던진 건지 찾을겁니다. (- -*) 후보 한 명인데 왜 반대표를 던져 참나 .. 그치만 지금은 저걸 취소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3 (15년)
편집장이었던 해죠. 쓸 게 참 많은데.. 생산성과 효율, 그리고 QoL을 위해서 노력했어요. 참 즐거웠고, 그 과정에서 초인이 희생해야하는 과도기적 시스템을 혼자 만들고 혼자 희생도 많이 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많이 갈렸어요.
그래도 조직을 경영해보는 것. 참 귀하고 재밌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15년도 말에 완전한 번아웃이 와서 15년도 기억은 많이 없어요. 15년도 10월쯤에 .. 한순간에 무기력해지고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이를 이겨내는데는 이후 몇 년이 필요했어요.
그 충격이 너무 커서, 저는 15년도 기억이 별로 없어요. 세세한 맥락을 누가 이야기해주면 말을 얹을 수도 있지만, 큰 흐름이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당장 기억나지는 않는 것 같아요.
15년도에 미국을 처음으로 다녀왔군요. 이건 기록이 남아있어서 찾았네요. 참 존경스러운 분들과 대회에 출전해서 미국에 한 번 갔었어요.
그것 외에는 . . . 모르겠어요. 15년도는 성취와, 진보와, 죄책감과, 미안함, 우울함 .. 이런 키워드들이 있는 것 같아요.
신문사 이야기는 그만해야 할 것 같아요. 쓸 것을 기억하려고하면 아직은 힘드네요. 기억되기만하고 기억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15년에 편집장을 했고, 우울증을 얻었습니다. 10월 26일에 진단을 받았어요. 그리고 아직까지 매년 10월 26일에 이 날을 기억합니다. 운동 열심히하고, 잠 잘 자고, 과로하지 말자! ㅎㅎ..
병특1년 (16년)
지금 생각해보면 병특을 참 이상하게 시작했어요. 우울증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 조언도 안구하고 막무가내로 시작했습니다. 뭐 결국 친절한 분들 덕분에 잘 풀리긴 했지만요.
제 생각은 이랬어요. ““아 나 편집장 끝나고 너무 힘들다. 공부를 바로 하긴 쉽지 않아 보이고 . . 흠.. 그럼 휴학을 해야하는데.. 그래! 병특이나 하자!” ← 여러분은 이러면 안됩니다 힘들면 쉬세요 그냥 6개월 쉬었어야하는데!!
그리고 초스피드로 대충 업체명 둘러보고 회사 한 3군데에 이메일을 보내요. 병특뽑아요? 답장 제일 일찍 온 곳에서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물론 제일 일찍 온 곳이 충분히 좋은 곳이었고 좋은 분들이 계셨어요 ㅎㅎ) 그리고 처음 일을 시작해서, 아장아장~ 걸음마부터 배웠습니다.
그러다 제가 아는 학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고, 또 이것 저것 더 잘해준다는 곳에 한 번 지원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거기로 이직을 했죠.
그러다가 .. 퇴사했던 것 같은데요? 뭐야 여기는 왤케 기억이 없어.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죠..? 코딩하다가.. 복학한것같은데.. 제가 에너지가 달려서 그런가? 지금 사실 이런일 저런일 중간에 인터럽트가 많이 걸려서 한 세시간째 쓰고있거든요?
병특2년(17년)
병특 3년, 3학년 2학기 (18년)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병특은 18년에 끝났습니다. ?? 16-18년에 나 뭐했지? 나중에 기억나면 채워넣을게요. 회사갔겠지 뭐.
5월에 끝났고 9월에 복학했어요. 학교는 재밌었습니다.
19년
음 여기도 좋았어요 특히 개별연구.. 근데 나중에 채워넣을게요 지쳤어요